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호칭이나 말투, 캐릭터 해석 등에 차이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민감하신 분은 창을 닫아주세요.
소꿉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내밀었다. 단추를 끌러 트인 소매 아래로 그을리지 않은 흰 팔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손을 내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손등이 위를 향하고 있어서 손을 잡아주겠다는 의도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가 손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자 마오는 손바닥이 위로 올라가도록 손을 돌리고 주먹을 쥐었다.
방금 들킨 참이다. 자신이 왜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은 맥을 못 추고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마늘을 싫어하는 이유도. 오래도록 거부해온 자신의 진실을. 자신마저 기피하는 현실을 알고서 그가 예전과 같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오는 잠깐 표정을 찡그리더니 손을 뻗어 가든 테라스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잡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손목 위를 세게 그었다. 두려워하며 낸 상처이니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칼날이 긋고 지나간 자리에 피가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마, 군… 이게 뭐하는 짓이야……?”
“마셔도 괜찮아. 으, 뾰족한 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그래서 양은 많지 않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라, 마, 이사라!”
“우와, 성으로 불렀어. 이거 너무하네. 상처라고.”
리츠가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킨 대신, 마오는 무릎을 굽혀 리츠와 눈을 마주했다. 팔에 얼룩진 피는 계속 흐르고, 꽃향기에 그 냄새가 섞여…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수천 년 전 이야기였다. 그 학원에 있던 사람들 중 지금 살아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아닌 사쿠마 리츠는 지금도 살아 있었다. 불멸의 흡혈귀를 자처하던 제 형도 인간의 명을 어쩌지 못했다. 소꿉친구의 죽음도 시간이 부스러질 만큼 먼 과거의 일이다. 슬픔 같은 건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진짜 불사불멸의 흡혈귀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도 지구에 남았다. 흙이 거칠어지고, 인간들이 병으로 쓰러져도 자신은 살았다. 많은 이들이 저들끼리의 학살과 전쟁을 반복해도 자신은 죽지 않았다. 혼자서 수십 세대의 탄생과 죽음을 보았다. 그 기억 모두가 빛이 바래되, 부서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어제 그는 마지막 남은 인간의 죽음을 보고 온 참이다. 그것에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 너무 오래 살았고, 그리고 그 인간에게 인지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에는 의미가 아주 없지 않았다. 이제 지구에 남은 생명은 리츠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것도, 대화를 할 상대도 없으니 리츠는 긴 세월을 잠을 자면서 보냈다. 책들은 거의 제 쓸모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책이라고 하면 졸업앨범 정도였다. 깨어있는 밤이면 앨범을 펴고, 펼친 페이지에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리츠는 아주 오래 살았지만 발을 딛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가끔 어딘가 여행을 가기는 했지만 반드시 돌아왔다. 몇 십 년인가 더 명맥을 이어가다 교문을 영영 닫은 유메노사키 학원이 보이는 곳으로. 그 곳은 공원이 되었다. 사람들이 줄어들고부터는 숲이 되었다가, 세계가 변하면서 사막 직전의 황무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지반마저 무너져 바다가 소용돌이치는 절벽이 되어 있었다.
만약 정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죽고 싶어진다면 리츠는 그리로 뛰어들겠다고 생각해 두었다. 아마 그래도 죽지는 못하겠지만, 가장 죽은 것과 가까운 상태가 될 것이다. 그래도 여태까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길 정도의 마음이 든 적은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것과 별개로 리츠는 절벽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일종의 산책으로 삼고 매일 즐겼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시간이라는 것은 아직 남아 있어서 저물녘이면 바닷물에 태양이 번지곤 했다. 파란 물에 번지는 태양의 붉은빛은 마치 그 날 파란 꽃에 떨어지는 피를 떠오르게 했다. 그러면 기억 역시 바닷물 냄새처럼 밀려든다.
매일같이, 눈을 감으면 마오가 팔을 내민다.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덤덤하게 말한다.
릿쨩이 불멸의 흡혈귀라는 걸 들었어. 수천 년이 지나서는 우리들 사이에 릿쨩만 살아있게 될 텐데, 릿쨩이 이렇게 내 피를 마셨으니 릿쨩이 살아있으면 나도 릿쨩과 함께 있는 거야.
그것을 차마 그대로 마실 수는 없어서 손으로 쓸어 자기 손가락을 핥는 동안 아주 약간 흔들리는 목소리가, 덤덤한 척 말을 이었다.
나는 수천 년 후에도 있고 싶어. 살아서 있을 수는 없으니 이런 방법으로라도 남아있고 싶어. ……미안해.
지구에 살아있는 존재는 흡혈귀 사쿠마 리츠, 딱 한 명.
그래서 지구에 남아있는 존재는 사쿠마 리츠와 이사라 마오, 어느 친구 둘.
눈을 감은 황혼의 바다 위로 눈이 내렸다. 사쿠마 리츠는 또 죽지 못하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